Max Born(1882-1970)은 예날에는 독일이었으나 지금은 폴란드 영토인 Breslau에서 성장하였고, 1970년 Gottingen 대학에서 응용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곧 바로 물리학에 전념하여야 겠다고 결심하였으며 1907년 강사 자격으로 Gottingen으로 돌왔다. 거기에서 그의 "중심 관심 거리"이였고 뒤에 다거도 자주 되돌아 왔던 결정 적자 이론의 여러 면에 대해 연구하였다. 1918년 Plank의 추천으로 Berlin에서 물리학 교수가 되었으며, Berlin에서 많은 활동과 더불어 Einstein의 바이올린 연주를 피아노 반주도 하였다. 일차 세계대전 때의 군복무와 Framkfurt의 시기를 거친 후 물리학 교수가 되어 Gottingen으로 돌아왔다.
그곳은 그의 지도로 이론 물리학의 놀라만한 중심지가 되었다. 그의 연구보조원 중에는 Heisenberg와 Pauli가 포함되어 있고, Fermi, Dirac, Wigner 그리고 Gpeppert 등이 그와 함께 연구하였으며, 이들 모두가 미래 Nobel상 수상자들의 이름이었다. 이 때를 Born은 다음과 같이 썼다 "독일 대학에서는 강의와 수업에 완벽한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다. 시험도 없었으며, 학생들을 텅제하지도 않았다. 대학은 단지 강의를 개설하고 학생들은 자신이 어떤 과목을 수강할 지를 결정하기만 하면 되었다." Born은 "밝은 고전물리의 영역에서 아직은 어둡고 탐험되지 않은 지하세계인 새로운 양자역학"으로 나아가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고, 양자약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이다.
입자의 파동함수Ψ(wave function)가 그 입자를 발견할 확률과 연관을 가진다는 기본 개념은 Born으로부터 처음나왔다. 그는 Einstein의 아이디어로부터 시작하였는데, "빛 파동의 진폭의 제곱을 광자가 존재할 확률밀도로 해석함으로서 입자(빛 양자 혹은 광자)와 파동의 이준성이 이해 가능하게 되도록 한 시도"를 하였던 아이디어였다. 이 아이디어를 곧 바로 Ψ-함수로 확장 할 수 있었다. Ψ절대값의 제곱이 전자(혹은 다른 입자)의 화률밀도를 나타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쉬운일이나 이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증명을 위해 원자 산란과정을 제안하였다. Born의 원자산란(원자와 여러 종류의 입자들과의 충돌)에 대란 양자 이론의 개발은 "자연현상에 대한 새로웅 사고 방법"을 입증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론물리의 중요한 한 분야의 토대를 세웠다.
Born은 다른 많은 과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Nazi 시대가 시작되는 1933년 독일을 떠나갔다. 영국 국민이 되었고, Cambridge 그 다음에는 Edinburg University에 있었으며 1953년 퇴임하였다. 스코틀랜드의 기후가 거칠다는 것을 알고, 또 전후 독일의 민주화에 기여하고자 Born은 나머지 여생을 Gottingen 근방의 Bad Pyrmont에서 보냈다. 그의 현대물리와 광학 교과서는 오래 동안 이 분야의 표준교과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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