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더퍼드(Ernest rutherford: 1871-1937)는 뉴질랜드 토박이로서, 대학원 공부를 위한 영국 Cambridge University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가족 농장에서 감자를 캐고 있었다. 그는 "내가 캐는 마지막 감자이다."라고 말하면서 삽을 빈어던졌다. 13년 후에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Cambridge에서 전자 발견을 곧 발표할 J.J Thomsdon의 연구생이 되었다. 그 곳에서 그 자신은 막 발견된 빙사능 현상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잣했거, 곧바로 방사능 물딜의 두 방출불인 α선과 β선을 구분하였다. 1898년에 Canada의 Mcgill 대학으로 갔는데, 여기에서 α선이 헬륨핵이라는 것과 하나의 원소가 방사능 붕괴를 하면 다른 원소가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화학자인 Frederick Soddy 등 다은 과학자와 협동으로 우라늄(uranium)이나 리듐(radium)과 같은 방사성 원소가 안정된 원소인 납이 되기까지의 연속적인 변환 과정을 추적하기도 했다.
1907년 Manchester 대학으 물리학 교수로 영국으로 되돌아왔고, 1911년에 원자의 핵 모델만이 유일하게 얇은 금속 막에서의 α입자 산란의 관측 결과를 설명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Rutherford의 마지막 중대 발견은 질소가 α 선으로 포격되었을 때 질소가 분해된다는 1919년에 보이고, 이는 인공적으로 한 원소가 다른 원소로 변환하게 하는 첫 번째 인공 변환의 예이다. 비슷한 다른 실험들 후에, Rutherford는 모든 핵은 그가 양성자라고 불렀던 수소핵을 포함하고 있다고 제안했다. 그는 또한 핵 속에는 중성의 입자도 존재한다고 제안했다.
1919년 Rutherford는 Cavendish 연구소 소장으로 Cambridge로 돌아왔고, 여기에서는 그의 격려로 원자핵애 대한 이해에 큰 발전들이 계속되었다. Canvendish 연구소는 고에너지 입자를 만드는 최초의 가속기가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가속기를 이용하여, 가벼운 핵이 결합하여 무거운 핵을 만드는 핵융합 반응을 최초로 관측하기도 하였다.
Rutherford에게도 과오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핵분열이 발견되기 전 그리고 최초으 원자 반응로가 건설되디 불과 몇년 전 까지만 해도 핵에너지의 실용화를 "달빛"만큼도 빋지 않았다. 그는 탕장의 후유증으로 1937년에 사망하였으녀, 웨스터민스터 성당(Westminster Abbe)의 Newton 가까이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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