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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과학자 story

마리아 괴퍼트메이어 (Maria Goeppert-Mayer)

by ◆파란사과◆ 2020. 9. 22.

 

 마리아 괴퍼트메이어(Maria Goeppert-Mayer: 1906~1972)는 Max Born의 아이들의 소아과 의사였던 사람의 딸로 독일에서 태어나, Born의 지도 아래 Gottingen에서 공부하였다. Born은 "그녀의 웃음과 춤과 그리고 익살이 있는 파티를 좋아하는 명량하고도 재치있는 Gottingen사교계의 멤버로 남아 있으면서도, 동시에 나의 모든 과목을 대단한 근면성과 성실성으로 통과하였다. 양자 역학에 대한 매우 우수한 학위 논문으로 박사학위을 받은 후에, 그녀는 결종 이론에 대한 문제를 나와 함께 연구하고 있었던 미국의 젋은이 Joseph Mayer와 결혼을 하였다."라고 회상하였다.

 

 1941년 12월 Goppert Mayer은 Sarah Lawrence에서 파트 타임으로 과학을 가르치는 첫 유급 전문직을 맡았다. 1947년 봄, 미국이 제 2차 세계대전에 휘말리면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녀는 Columbia University의 SAM(Substitute Alloy Materials) 연구소에서 Urey의 파트 타임 연구게시물을 수락하였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천연 우라늄에서 핵분열 성 우라늄-235 동위 원소를 분리하는 수단을 찾는 것이었다. 그녀는 6불화 우라늄의 화학적 및 열역학적 특성을 연구했다. 광화학 반응에 의한 동위 원소 분리 가능성을 조사했다. 이 방법은 당시에는 비실용적인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레이저의 개발은 나중에 레이저에 의한 동위 원소 분리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녀의 친구인 Edwaed Teller를 통해 Goeppert Mayer는 콜롬비아에서 Opacity Project로 지위를 얻었다. 이 프로젝트는 극도의 고온에서 물질과 방사선의 특성을 연구하고 Teller의 전시 프로그램인 "Super"폭탄 개발에 목적이었다. 1945년 2월  Joe는 태평양 전쟁에 파견되었고 Goeppert는 자녀를 뉴욕에두고 Los Alamos Laboratory의 Teller 그룹에 합류하기로 결절했다. Joe는 예상보다 일찍 태평양 전쟁에서 돌아 왔고 1945년 7월 함께 뉴욕으로 돌아왔다.

 

 1948년 Chicago 대학에서 1930년 초에 발견된 이후 여전히 불가사의로 남아 있었던 핵의 안정성의 주기성에 대한 문제 제기를 제개하였고, 실험과 일치하는 껍질 모형을 고안하였다. J.H.D. Jensen도 독일에서 비슷한 이론을 동시에 독립적으로 발표하였는데. 이 업적으로 두 사람 모두 1963년에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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